[클래식 공연] 스위스 취리히 조성진 피아노 협연 (2022년 9월)

2022. 10. 3. 00:17공연후기

지난 몇일간, 작고 초라한 나의 헛간(?) 블로그에 평소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는데, 아니나다를까 조성진의 에든버러 공연 후기 글을 많이 보고 가셨다. 이참에 지난주에 간 조성진의 또다른 공연 후기를 어서 써야겠다 싶었다. 

 

사실 이렇게 한달만에 다시 조성진의 공연을 볼 수 있게 될줄은 몰랐다. 당연히 나는 국가를 넘나들며 쫓아다니는 팬이나 스토커는 아니고... 지난번 에든버러 공연은 휴가지에서 우연히, 이번 공연은 집근처(?)에서 우연히 열리는 것을 발견하고 가게 되었다. 사실 여름휴가기간동안 돈도 많이 탕진하고 클래식공연을 네 번이나 관람했기 때문에 (BBC 프롬스, 조성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랑랑 루체른 페스티벌, 브레겐츠 페스티벌. 이 후기들은 차차 또 써볼게요...),  앞으로 연말까지 공연을 또 갈 기회가 있겠나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취리히 지역에 사시는 트위터 지인(?)분께서 취리히의 조성진 공연 정보를 알려주셔서 급하게 또 헐레벌떡 예매를 하게 되었다. 

 

이번 여름의 인텐시브한 공연 관람 결과, 나는 통장에 빵꾸가 나지 않는 이상 공연은 무조권 앞자리에 앉겠다는 철칙을 세웠다. 확실히 거리가 있는 것보다 앞자리에서 관람을 하는게 1) 집중력도 훨씬 좋고, 2) 관객의 방해도 덜 받을 수 있고, 3) 기억에 훨씬 오래 남는다. 좀 극단적인 예로, 몇년 전 미국 대학원 시절, 근처 대도시 오케스트라 공연을 1열에서 본 적이 있는데 (진짜 맨 앞줄;;;) 공연이 다 끝나고 박수를 치던 중 콘서트마스터 뒤에 앉아있던 바이올리니스트와 눈이 마주쳐서 입으로 '오우 그뤠잇...'이라고 뻥긋댔더니 '땡큐'를 들은 기억이 있다. 이게 뭔가 싶지만, 그 프로그램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데 이 기억만 나는걸 보면 기억은 확실히 오래 남는거같다;; 어쨌든 결론은, 이번 조성진 공연도 자리가 남아있는 한에서 최선으로 R석을 골랐다는 것. CHF150 퍼가요~

 

이번 2022년 9월 25일 취리히 공연은 뮌헨 필하모닉이 두곡을, 조성진과의 협연이 한곡, 이렇게 구성되어있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번 공연이 조성진의 취리히에서의 데뷔 공연이라는 것. 

  • 드보르작 카니발 서곡 Op 92. 
  • 라벨 피아노 협주곡 G major
  •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Op 14.

 

참고로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뮌헨 필하모닉과 조성진은,  지난주 수,목 뮌헨에서 공연을 한 뒤 바로 어제 토요일, 베른에서 공연을 하고, 오늘 취리히에서 일요일 연주를 하는 거다. 말로만 들어도 빡빡하다. 사실 일요일 공연은 연주자나 관람객에게 피하고싶은 날일거같다. 그다음날이 월요일이라는 이유 말고도, 스위스의 일요일은 안식일(?)같은 개념으로 모든 식당, 마트를 비롯한 서비스업이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요일이 공연날이라면, 근사한 저녁을 먹고 공연을 보러 가는 스케줄이 성립이 안된다. 집에있다가 나른해질쯤 옷 꿰어입고 나가야 하는거다. 게다가 요즘 해가 점점 짧아져서 7시면 어둑어둑해지는데다 이날 또 비가 하루종일 내려서 눅진눅진한 날이었다. 

 

취리히에서 클래식공연이 열린다 하면 바로 여기 톤할레 취리히Tonhalle Zurich다. 예술의 전당에 익숙해져 있다면 꽤나 아담하고 작은 크기의 콘서트장이라 생각할수도 있는데, 유럽의 클래식 콘서트장은 대게 이런 사이즈인듯하다. 1층 메인홀과 2층 발코니로 이루어진 심플한 구조로, 오스트리아 빈의 골든홀과 좀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Tonhalle Zurich 내부. 다른날 찍은거라 악기구성이 달라요;;; 공연장 느낌만 봐주시길

 

공연장이 작은 만큼 무대도 작고 관객석도 작다. 뮌헨 필하모닉은 꽤나 인원 구성이 두툼해 보였는데, 좌우로 앉은 제1,2 바이올린의 뒷부분 연주자들은 벽과 앞사람 사이에 끼여 앉은 느낌이었다. 관객석도 좁은 편인데, 도통 그럴 경우가 없는 취리히에서 서울 지하철 수준으로 옆사람과 밀착해 앉아야 하는데다 다리도 꼭 붙이고 다소곳히 앉아야 할만큼 가로세로 폭도 좁다. 

에든버러 공연에서는 공연장 주변으로 마이크가 여럿 설치되있는게 보여서, 앗 레코딩을 좀 하나 싶었는데, 이날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 7시 30분. 뮌헨필이 먼저 등장해 카니발 서곡을 연주했다. 나른해지는 일요일 저녁에 스위치를 딱 켜는 느낌으로 신나는 멜로디와 타악 덕분에 집중도가 확 올라갔다.

이 후 스탭들이 공연장 위로 올라와 주섬주섬 그랜드 피아노를 설치했다. 사실 이런 식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피아노'는 최근 몇번 보긴 했는데, 그때마다 좀 이상한 느낌이다.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심포니와 피아노 협연이 프로그램에 섞여 있는 경우, 1부 처음 또는 2부 처음에 피아노 협연을 배치해 공연시작 전 또는 인터미션을 이용해 피아노를 무대에 설치했던것같은데 (아닌가;;). 물론 이렇게 하면 관객석이 좀 환기도 되겠고, 협연자도 1부 끝나고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게지만서도, 관객이 다 들어차 있는 상황에서 무대 설치를 한다는게 아직은 좀 어색한 느낌. 어딜 보고 있어냐 하나요...;;

어쨌든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로 들어오고, 앞쪽에 앉았던 바이올린들이 좀더 뒤쪽으로 찌그러져(?) 간 뒤 조성진이 등장했다! 그는 지난달 에든버러 공연 이후 한번도 이발을 안한 느낌이었는데, 그의 긴 머리를 좋아하는 팬분도 많은 것 같더라. 나는 좀 엄마의 마음(?)으로 DG 인터뷰때처럼 이쁘게 하고 나와서 다른사람들에게도 멋있게 보였으면 싶었지만, 일요일까지 진행되는 빡빡한 연주 일정에 그런 오지랖은 넣어두기로 했다 (안넣어두먼 어쩔건데;;;). 여전히 그는 크고 긴 손으로 연주하며, 공연중 관객석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ㅎㅎ  

 

라벨 피아노 협주곡은 우연히도 지난달 BBC Proms 공연에서 Tom Borrow가 연주한 버전을 들었던 터라, 조성진의 버전은 어떻게 다를까에 관전포인트를 두었다. Tom Borrow는 아직 20살밖에 안된 어린 피아니스트로, 그의 라벨 피협은 미스터치나 날리는 느낌은 꽤나 많았음에도 감정 충만한 2악장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을 넉넉히 바른 스콘 느낌으로 아주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랄까. 몸만 커버린 20살 남자애가 감정을 주체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쓰는 러브레터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반면 조성진의 라벨 피협은 좀더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2악장을 평행선에 놓고 비교해보자면 깔끔한 터치에 힘의 강약조절이 능숙한 느낌. 미스터치도 없는 느낌이라 듣기가 편했다. 비유를 해보자면 어스름한 새벽녘 일어나 편지지를 꺼내 창문 너머 안개를 바라보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꾹꾹 눌러 쓰는 편지 느낌. 사실 조성진의 연주는 이제 미스터치 같은 기계적인 완성도를 논하는 수준은 분명히 넘어섰고, 그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뮌헨필과도 협연을 오래도록 하고 있는 터라 합도 굉장히 좋았다. 

1부 공연이 끝나고, 조성진은 지휘자와 콘서트마스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앵콜곡을 하나 연주했다. 조성진의 역량을 120% 보여준 무지막지하고 파워풀한 곡이었는데, 기억이 분명치 않다. (이것저것 후보곡들을 들어보고 확실히 알게 되면 업데이트 할게요...)

갑자기 든 생각인데, 개인적으로 조성진은 베토벤과 쇼팽이 정말 잘 어울리는것같다. 깨끗하고 힘있는 터치와 강약조절 능숙한 루바토. 더 어렸을때는 레파토리에 종종 베토벤이 있었던거같은데, 쇼팽 콩쿨 이후에 베토벤이 확 줄어든 느낌이다. 물론 음악의 영역대를 넓혀가는것도 좋고 지금처럼 헨델과 같은 고전을 되짚어 레파토리를 짜는것도 대찬성이나, 베토벤 레코딩이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ㅎㅎ 

 

여튼 이날 공연은 사진을 한장 찍었다. 너무 대놓고 찍고싶지는 않아서 낮은 각도에서 찍었더니 사람들 머리가 많이 나왔네...

박수도 치고싶고 사진도 찍고싶고

 

제 트위터 지인분이 찍은 사진도 보세요!

https://twitter.com/buceo_x/status/1574103297086177281?s=46&t=Ir0qYMI8hjlwIOm8UiJ-iQ

 

트위터에서 즐기는 꼬르륵

“으아니 사진 이렇게 찍혔을 줄이야ㅋㅋㅋㅋㅋ 성진초 그의 찰랑거리는 머릿결”

twitter.com

 


 

근데 이날 중요한 사건은 이 이후에 일어났다!!!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이 시작하자, 나는 1부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의자에 널부러져 앉아있었다. 근데 갑자기 무대 뒤 왼쪽 문이 열리더니 조성진이 한 스탭을 따라 걸어나오는게 아닌가?!!! 나는 (☉_☉) 이렇게 되고서 무슨 상황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며 눈으로 그를 쫓았고, 곧바로 일어나 그가 나간 곳으로 따라나갔다. 따라나간 로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샴페인을 한잔씩 하고 있었고 그 왼편에서는 조성진이 씨디 싸인회를 하느라 서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곧바로 씨디를 한장 사야지 마음먹었는데, 줄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많아봐야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부채처럼 그를 에워싸고 멀찍이서 사진을 찍거나 종종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있었다. 이건 대박적 기회다 싶었다. 테이블에는 지금까지 그의 레코딩이 쭈륵 놓여있었고, 나는 개인적 의미가 있는 드뷔시 앨범 (2017)을 픽한 뒤 또 줄이 하나도 없는 그의 앞으로 가 싸인을 부탁했다. 

사실 그를 보자마자, 하고싶은 말이 머릿속으로 파바박 튀면서 목까지 넘쳐흘렀다. 예컨데, 지난달에 에든버러에서 공연 보고 왔다, 그때 앵콜 너무 좋았고 이번에 한국에서 그곡을 치는걸 알게됐다, 한국에 잘 다녀왔으면 좋겠다(?), 라벨 가스파르 다시 칠 계획이 있는지 (예...?) 등등... 근데 이 확신의 내향형 MBTI I인 나 소심이는 싸인을 받고 '와... 감사합니다' 외마디를 외친게 다였다. 전설속 인물을 실제로 본 느낌에 압도당한 채, 나는 인터미션이 끝나고 돌아나가는 그를 눈으로 배웅할 수 밖에 없었다ㅜㅜ

 

인터넷에서 주운 사진 (출처를 아시는분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아마 저 오른쪽 분 뒤에 있었을거에요

 

2부 베를리오즈는 잘 기억이 안난다. 문득문득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렸다는 것과, 특이하게도 5악장이나 되는 곡이었다는 점, 그리고 5악장 시작하자마자 한 관객이 쓰러져(!!) 잠시 공연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한 점.

 

 

여전히 비가 오는 일요일 밤, 트램을 타고 집에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싸인 씨디를 다시 눈에 담았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날은 기억이 날것같다. 나중에 또 천운이 겹쳐 오늘같은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아무말이나(?) 해봐야지! 

가보가 된 싸인씨디. 거실 수납장에 고이 세워져 있다.

 

돌이켜보니 이날 뮌헨필을 이끈 지휘자 라하브 샤니Lahav Shani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대게 백이면 백 지휘자들은 지휘봉과 지휘자용 악보를 펼쳐놓고 지휘를 하는데, 샤니는 봉도 악보도 없이 단상에서 맨몸에 맨손으로 지휘를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이스라엘 출신의 89년생 젊은 지휘자로,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역사상 최연소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었다고. 근데 그의 이런 이력 뿐 아니라,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로서 인간적인 리더십도 굉장한 것 같았다. 유투브에는 그의 생일날 열린 공연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갑자기 생일축하곡을 연주하는 prank 영상도 있었고 (싫어하는 보스를 위해 이런 프랭크를 준비할 리는 없으니), 확실히 이번 취리히 공연에서도 뮌헨필 단원들 내부 뿐 아니라 지휘자와의 끈끈한 결속력이 느껴졌다. 

 

끝!